쇼엔 가나마루
1429년부터 1879년까지 450년의 세월에 걸쳐서 지속되어온 류큐왕국. 이 왕조는 류큐를 처음 통일시킨 쇼하시(尚巴志)의 유서 깊은 제1쇼 씨 왕통과 1470년 이후 정권을 잡은 제2쇼 씨 왕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쇼엔(尚円)은 제2쇼 씨의 시조로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쇼엔(尚円)은 1415년, 농부의 아들로 이제나섬의 쇼미(諸見)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니시누마치가니(松金)라고 불렸고 어릴 때부터 부지런해서 벼농사 등 농사일에 힘썼습니다. 섬에 가뭄이 심했던 해가 있어 논들의 물이 말라갔지만 쇼엔(尚円)의 논만은 항상 물이 넘쳐났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성실하고 재주가 좋은 쇼엔(尚円)에게 호감을 느낀 마을 처녀들이 매일 밤 그의 논에 물을 날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소 쇼엔(尚円)의 인기를 질투하던 섬의 청년들이 '쇼엔(尚円)의 논에만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가 다른 논에서 물을 훔쳤기 때문이다'며 쇼엔(尚円)에게 물 도둑의 누명을 씌워 비난을 했습니다. 쇼엔(尚円)은 섬의 관리에게 '물을 훔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섬의 청년들은 물 도둑을 구실로 삼아 쇼엔(尚円)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쇼엔(尚円)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에 실망하여 '한 번의 날갯짓으로도 천 리 만 리를 날 수 있는 붕새처럼 나도 이 섬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윽고 아내와 어린 동생(훗날 제2쇼 씨 왕통 제2대 국왕 쇼센이, 尚宣威)을 데리고 작은 배를 타고 섬을 떠납니다. 이 때 쇼엔(尚円)의 나이는 24살이었습니다.
섬을 탈출한 쇼엔(尚円)은 일단 오키나와 본섬 북부의 구니가니(国頭)에 거처를 정했다가 3년 후, 슈리(首里)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는 류큐왕국의 제1 쇼 씨 왕통 제5대 국왕 쇼킨푸쿠(尚金福)의 남동생인 고에쿠(越来) 왕자의 부하가 됩니다. 본래 두뇌가 명석하고 근면 성실한 쇼엔(尚円)은 곧 그 자질을 인정받고, 고에쿠(越来) 왕자가 왕에게 쇼엔(尚円)을 관리로 임용하도록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이로 인해 1447년, 쇼엔(尚円)은 게라에아쿠카베(家来赤頭)라는 하급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쇼엔(尚円)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두각을 드러내며 노란색 하치마키를 두르는 고관까지 올라 출세합니다. 그리고 1415년 고에쿠(越来) 왕자가 제6대 국왕, 쇼타이큐왕(尚泰久王)에 즉위하자 다시금 중용되어 1454년 니시하라(西原) 마기리(間切)의 지토(地頭, 영주)로 임명됩니다.
이후 5년 후인 45세 때, 국가의 재정과 외교를 담당하는 오모노구스쿠우사스노소바(御物城御鎖之側)라는 관직에 취임합니다.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장관에 버금가는 삼사관(三司官) 벼슬자리를 눈앞에 두게 되는 것인데 쇼타이큐왕(尚泰久王)의 서거로 이후 그의 운명을 크게 바뀝니다.
제7대 국왕, 쇼토쿠왕(尚徳王)은 폭군이었습니다. 온 나라에 탄식과 슬픔으로 가득하여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쇼엔(尚円)은 왕에게 직언하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쇼엔은 관직을 버리고 영지(領地)인 우치마(内間)에 칩거했습니다.
쇼토쿠왕(尚徳王)이 죽은 후, 조정은 신하들의 의한 반란이 일어났고 세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음 국왕으로 쇼엔(尚円)을 추대합니다. 쇼엔은 처음에 거듭 사양했지만 이윽고 설득을 받아들여 국왕이 되었습니다.